유정길 지혜공유협동조합 이사장·불교환경연대 운영위원장

 

기도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과연 정말 좋은 세상이 될까? 모든 사람이 서울대학교에 가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이 이루어진다면 우리나라의 교육시스템은 엉망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돈을 많이 벌고 잘살게 되어 미국과 같은 경제수준이 된다면 어떻게 될까? 엄청난 자원자원이 삽시간에 파헤쳐져 환경위기를 초래해 지구는 결딴이 나고 더욱 빨리 인류는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이다.

기도한다고 골대에 공을 넣어 우리편만 이기게 해주는 알라신, 기도한다고 나만 시험에 붙게 해주는 부처님, 나만 특별히 직장에 취직시켜주고 승진시켜주는 하나님, 나만 잘먹고 잘살게 부자되게 해주는 비쉬누신이라면. 이러한 신은 인간의 탐욕이 창조한 신이지 진정한 신의 모습은 아닌 것이다. 독일철학자 포이에르바하가 ‘신학은 결국 인간학’이라고 말한 이유는, 신이 인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인간의 욕망과 공포심이 신을 만들었다는 것을 이 말이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과 같은 경쟁사회에서의 나의 성공은 결국 누군가의 실패위에 쌓아놓은 것이다. 내가 대학에 붙으려면 한정된 정원에서 누군가 떨어져야 한다. 합격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누군가를 떨어지라는 기도이다. 승진하게 해달라는 기도는 결국 누군가는 승진에서 탈락하게 해 달라는 기도이며, 이기게 해달라는 말은 상대를 지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렇게 개인의 이기심에 근거한 욕망을 담은 이기적인 기도를 정말 들어주는 신이라면 과연 좋은 신일까? 이런 기도가 ‘실제 신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런 신은 ‘위험한 신, 심각하게 잘못된 신’인 것이다. 한 사람만을 위해 모든 자연법칙을 거꾸로 돌려달라는 기도를 들어주는 신, 나에게 이익이 되고 상대를 손해를 끼치게 해달라는 탐욕의 기도를 들어주는 신이 있다면 믿어서는 안 되고, 사랑의 신도 아니며 신봉해서는 안 되는 불온한 신인 것이다.

모든 사람들의 이러한 이기적인 기도가 다 이루어지면 세상은 큰일이 난다. 어쩌면 세상은 그러한 기도가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유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내 뜻대로 안되기 때문에 세상은 잘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종교는 하나, 오직 ’돈’

이들 종교는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하나이다. 오로지 ‘돈’이라는 하나의 종교를 숭배하는 각기 다른 버전이 아닐까? 사람들이 부처님이나 예수님에게 보시하고 헌금을 하면서 “믿습니다. 주시옵소서”라고 말한다. 보시하고 헌금을 많이 할테니, 승진하도록, 대학에 붙도록, 축구에 이기도록, 사업에 성공하도록, 자기 삶에 이익이 될 결혼상대를 만나게 해달라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과 부처님은 일종의 복덕방의 거간꾼 역할을 요구한다.

신이나 부처님, 하나님에게 말 좀 잘해서 대학에 합격하게 해달라는 것이며, 헌금을 많이 할테니 승진하게 성공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때 헌금과 보시는 일종의 복채이며 투기, 투자인 것이다. 10만원 주면서 100만원 벌게 해달라는 의도이기 때문이다. 베풀고 나누지 않고 끊임없이 요구하며 ‘달라’는 종교는 산업사회의 확대된 욕망을 충족시키는데 동원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이미 많은 복을 받았고 은혜를 입고 있다. 감사할 일이 많은데도 항상 부족하다고 더 달라고 한다. 아무리 경제가 어렵다고 해도 우리는 전세계 GDP 11위권의 풍요를 누리는 나라이다. 이미 많이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않고 항상 부족하다고 투정하며 더 달라고 때를 쓰는 사람에게는 더 주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복 많이 받으세요’가 아니라 ‘복 많이 지으세요’로

2017년 새해가 시작되었고 사람들끼리 서로 덕담을 나눈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라는 덕담이다. 복을 받는다는 것은 뭘까. 100원 투자해서 100원 버는 것은 복이라고 할 수 없다. 100원을 투자해서 200원, 300원 더 나아가 1000원 1만원을 벌어야 ‘복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투자에 비해 많은 이익을 얻으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오히려 화(禍)가 된다. 해놓은 이상으로 복을 누리면 그게 모두 삶의 독이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힘들여 벌지 않고 복권을 통해 일확천금을 번 사람들의 삶을 보라. 복이 아니라 재앙이 된 사례를 많이 보지 않던가? 그래서 ‘복을 많이 받으라’는 것은 덕담이 아니다. ‘복을 많이 지으라’는 것이 덕담이 되어야 한다. 상대를 이롭게해주고 이웃을 행복하게 해주고, 남을 많이 도와주는 일은 마치 밥을 ‘지어’ 가족들을 먹이는 것처럼 복을 ‘짓는 일’이다. 그렇게 이웃과 사회를 행복하게 해서 결국 나도 그 속에서 행복해지는 것이다. 일종의 ‘쓰리쿠션 행복’이라고 할까? 그래서 올해는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 대신에 ‘복많이 지으세요’라는 덕담을 나누도록 하자.

 

저작권자 © 고양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