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연재를 시작하며...

1919년 기미독립선언 100주년을 맞아 각계각층에서 3·1운동을 비롯한 항일독립운동의 사건과 인물을 새롭게 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고양신문도 고양에서 펼쳐진 저항과 투쟁의 역사를 짚어보는 기획을 시작한다.

고양의 독립운동사에 접근하기 위해 먼저 당시의 행정구역과 교통망 등 100년 전 고양땅을 이해하기 위한 기초적 요소들을 정리하며 첫 회를 열고자 한다. 이어지는 연재에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다뤄질 예정이다. 우선 3·1운동에 앞서 고양에서 일어난 항일운동을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을 중심으로 정리할 것이다. 다음으로 이번 기획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고양에서의 3·1운동을 2회에 걸쳐 소개할 예정이다. 이어 고양의 독립운동을 대표하는 두 인물, 양곡 이가순과 동암 장효근의 삶과 업적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이들의 행적과 사상은 한층 깊이 있는 조명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들불처럼 유장하게 이어진 고양의 독립운동의 역사가 오늘날 우리에게 던져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바람직한 계승방안을 모색해 보는 것으로 연재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긴 연재를 예고하며 두려움과 부담을 숨기기 힘들다. 역사학자가 아닌 기자가 ‘고양의 독립운동사’라는 장대하고 숭고한 주제를 내 건 연재를 최소한의 완성도를 담보한 기사로 이어갈 수 있을지 염려되기 때문이다. 비전공자 특유의 자유로움을 십분 활용하는 것에서 출구를 찾을 수밖에 없다. 사실관계의 기술은 전문가들이 제시한 다양한 자료에 근거하고, 그 자료의 행간을 일반인의 시선에서 상상력으로 채워가는 전략 말이다. 연재가 이어지는 동안 독자들께서 너그러운 마음 품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7회로 기획된 시리즈 전체의 방향을 잡아주는 키워드는 바로 ‘민초들의 고통’이다. 고양땅의 선조들이 흘린 피와 눈물, 그리고 그 고통의 에너지를 항일과 독립의 열망으로 승화시킨 역사를 조심스레 더듬어가는 여정에 독자들도 기꺼이 동행해 주시기를 기대한다.

 

끈질기게 이어진 민초들의 저항

일반 시민들에게 ‘고양의 독립운동’은 어딘지 낯설다. 고양에서도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을까? 고양을 대표하는 독립지사는 누구일까? 이런 물음에 선뜻 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지난해 일산문화공원에 느닷없이 세워진 고양독립운동기념탑이 조금은 뜬금없이 느껴진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대표적 사건이나 인물도 없으면서 너무 거창한 탑을 세운 것 아니냐는 것이다.

반면 한편에서는 시민들의 이러한 무관심을 안타깝게 여기며 “고양에서도 전국적 지명도를 얻을 수 있는 사건이나 인물을 발굴해 집중 조명해야 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이들의 문제의식은 유명 강사를 초청해 고양의 독립운동가를 소개하는 강연을 열고, 사건과 인물을 기리는 대규모 행사를 열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두 입장은 서로 상반된 것 같지만, 실은 인식의 근저에 동일한 생각을 깔고 있다. 독립운동의 역사마저도 뭔가 ‘파워풀한 콘텐츠’에 기대어야 생명력을 얻는다는 믿음 말이다.

고양신문의 기획은 그러한 강박을 지양하려고 한다. 고양땅에 독립운동과 관련된 ‘파워풀한 콘텐츠’가 부족해서가 아니다. 오히려 자료를 들추면 들출수록, 고양에서는 수없이 많은 민초들이 가장 순수하고 본능적 저항의 형태로 일제의 폭압적 지배에 끈질기게 맞섰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누군가는 장터에서, 누군가는 산 꼭대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심지어 일경을 피하기 위해 한강에 배를 띄워가며 만세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를 굳이 영웅으로 만들어야 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당시의 시대와 상황을 최대한 정확하게 이해하고, 이 땅에서 끈질기게 펼쳐진 민초들의 저항의 흔적을 소중하게 더듬는 게 강렬한 사건과 인물을 찾아내려는 조바심보다 훨씬 소중하기 때문이다.

 

1910년 고양의 인구는 3만명

100여 년 전 고양의 사람들은 어떤 일상을 보냈고, 무슨 고민을 가지고 살았을까. 무엇보다도 그들은 어떤 고통에 처해 살았을까. 3·1운동 당시 고양을 상상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그 시절을 가슴으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다양한 자료와 기록에 기대어 당대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려는 ‘상상의 타임머신’에 올라타야만 한다.

100년이라는 시간은 고양땅을 너무도 다른 곳으로 바꿔놓았다. 단순히 비교해 봐도, 1910년 경술국치 당시 고양군의 인구는 겨우 3만 명에 불과했다. 105만 인구가 북적대는 오늘날과 비교하자면, 1개 동 규모도 안 되는 수준이다. 한양 서북쪽 드넓은 평야지대를 품고 있는 땅에 고작 3만이라니…. 그러므로 당대의 자료에 등장하는 어느 면소재지, 또는 어느 장터에서 수 십 명, 수 백 명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다는 기록을 지금의 감각으로 이해하려 하면 곤란하다.

 

한양을 향한 열망이 머문 곳

고양의 주된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대부분의 민초들은 소규모 자영농, 또는 소작농으로서 땅에 기대어 삶을 이어가고 있었다. 일부는 지금까지 명맥을 이어오고, 일부는 신도시의 지명(예를 들면 흰돌마을, 문촌마을 등)으로 흔적을 남긴 전통 자연부락들은 하나같이 농업을 기반으로 한 농촌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지배계급은 어땠을까. 고양땅은 예로부터 한양과 가까운 지리적 특성상 나라로부터 공신전 등을 받은 왕족과 공신들이 곳곳에 기거했고,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지방 명문가의 자제들이 거처를 마련하는 고장이기도 했다. 지배계층이 지역을 기반으로 강고한 토착 유력가문을 형성하기보다는, 가까이 중앙 권력의 영향권에 있었다는 점은 19세기 말 수구적 위정척사 사상을 기반으로 지역의 토착 유림들에 의해 거병한 초기의 의병운동이 고양에서는 전혀 일어나지 않은 까닭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참고로, 고양에서의 의병활동은 1907년 일제에 의한 군대 해산 이후 매우 활발하게 전개된다. 이 때의 의병들은 당연히 위정척사의 명분을 따른 초기 의병과는 성격과 구성이 확연히 다르다.
 

일제의 흔적 ‘고양에 붙인 서울’

기획을 시작하며 가장 먼저 부딪힌 고민은 ‘고양’의 공간적 범위를 어디까지로 정하느냐의 문제였다. 고양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의 역사를 가장 풍부하게 집대성한 자료는 2013년 광복회 고양시지회에서 발간한 『고양 독립운동사』 라는 책자다. 대한민국역사문화원 이정은 원장이 저술한 이 책은 일제강점기를 전후한 우리나라의 역사와 고양의 독립운동사를 함께 아우르며 수많은 사건과 인물을 조명한 역작이다.

하지만 이 책은 1916년 일제에 의해 구획된 지방행정구역상의 고양군 지역 전체를 고양의 역사로 다루고 있다. 당시 일제는 지금은 서울의 경계 안에 있는 6개 면을 고양군에 붙여, 고양군이 총 12개 면을 관할하는 기형적인 행정구역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지금의 고양땅 외에 은평면(은평구), 연희면(서대문구), 용강면(마포구와 여의도), 숭인면(동대문·강북구), 한지면(성동·용산구), 뚝도면(광진구)이 모두 고양군에 속했다. 사대문 안과 일본군 군영이 주둔했던 용산 일부를 제외하면 수도 경성의 외곽을 고양군이 모두 둘러싸고 있는 형국이었던 것이다. 이는 당연히 오백년을 이어온 조선의 수도 한양의 위상을 축소하려는 일제의 의도에 의한 것이었다.

이정은 박사는 고양은 서울과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공간적 공동체였다는 관점을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고양 독립운동사』에서 다뤄진 많은 사건의 대부분은 지금은 다시 서울땅으로 되돌아간 지역에서 펼쳐진 이야기들일 수밖에 없다. 집중 조명한 인물들 역시 고양에 편입된 서울땅에 출생지나 주소지를 둔 이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관점은 한민족 전체의 독립운동사를 거시적으로 기술하며 서울과 인접 지역의 역할을 조망하는 장점을 지니지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고양땅에서 벌어졌던 사건들에 실체적으로 다가서는 데는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술방식은 위의 책 외에도 2005년 완간된 『고양시사』 등의 자료에서도 유사하게 드러난다. 그래서 고양신문은 다양한 자료에서 오로지 ‘지금의 고양땅’을 기준으로 한 인물과 사건들만을 골라내려고 한다.
 

1919년 고양군 지도. 붉은 바탕은 원래의 고양군에 속했던 6개 면. 현재의 고양시 경계와 거의 일치한다. 파란 바탕은 1916년 일제에 의해 어거지로 고양군에 편입된 6개 면. 경성의 위상을 위축시키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결과물이다.


고양 6개면, 지역농협으로 이어져

100여년 전 고양의 행정구역에서 위에서 언급한 6개 지역을 빼면 벽제면, 원당면, 신도면, 지도면, 중면, 그리고 송포면이 남는다. 이 지역이 바로 오롯한 지금의 고양땅이다. 이 중 4곳은 지금의 행정구역 이름에도 흔적을 남겼지만, 중면과 지도면은 종적을 감췄다. 중면은 지금의 일산지역이고, 지도면은 화정과 능곡이라고 보면 된다.

6개 면의 중심지가 어디였나를 살펴보면 과거 고양땅에 살았던 이들의 거주와 생활권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벽제면은 고양군청과 향교가 자리했던 고양동이고 원당면은 지금의 고양시청이 있는 주교동 일대다. 신도면은 구파발과 삼송동, 지도면은 행주동과 능곡동, 중면은 일산동, 송포면은 송포·대화·덕이동이다.

6개 면의 이름은 고양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기관에 수많은 흔적을 남겼다. 교육기관만 봐도 벽제초, 원당초, 신도초, 지도중, 일산초, 송포초 등이 100년 안팎의 역사를 자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6개 면의 이름과 영역을 고스란히 반영한 조직이 있는데, 바로 고양시의 6개 지역농협이다. 벽제농협, 원당농협, 신도농협, 지도농협, 일산농협, 송포농협의 지역적 기반이 1916년 일제에 의해 확정된 행정구역정비의 결과물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점은 100년의 시간이 하나의 맥을 가지고 오늘날의 삶과 이어진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증명해준다. 또한 고양땅의 근본적 생산 토대가 농업이었다는 사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이 6개의 이름과 위치를 머릿속에 잘 담아두는 것은 100년 전 고양지역 곳곳에서 들불처럼 번졌던 독립운동사를 되짚기 위한 아주 유용하고 소중한 기초작업이다.


육로는 의주로, 수로는 행주나루

사람들은 ‘교통망’이라는 흐름의 네트워크를 타고 모이고 움직인다. 조선시대 고양땅의 가장 크고 중요한 교통망은 2개였다. 육로는 의주로, 수로는 행주나루가 그것이다.

의주로는 한양에서 북쪽으로 길을 나서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가는 길의 출발점이다. 한양에서 무악재와 박석고개를 넘어 지금의 오금동 숫돌고개를 지나 고양동을 만나고, 다시 혜음령을 넘어 파주로 이어진다. 덕분에 의주로의 1차 기착지인 고양동에는 고양군청과 향교, 그리고 중국의 사신을 맞았던 벽제관이 자리했다. 3·1운동 당시 여러 차례의 만세운동이 고양동과 관산동에서 발생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다. 길을 타고 사람도 소식도, 독립의 열망도 흐르게 마련이니까.

육로인 의주로가 행정과 외교를 상징했던 길이라면, 수로인 행주나루는 경제와 교류에 방점을 찍을만한 길이다. 서해바다를 거슬러 올라와 강화 해협을 통과해 한강으로 진입한 배들이 가장 먼저 만나는 큰 포구가 바로 행주나루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소금과 새우젓을 부리기도 했고, 여장을 추스른 후 최종 목적지인 마포나 광진나루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했다.

이처럼 수도 한양의 외곽 포구 역할을 했던 행주나루는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개화기를 맞아 새로운 성격을 부여받게 된다. 바로 바다 건너 온 신문물이 흘러드는 관문이 된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지금도 행주외동 언덕에 나란히 자리한 행주성당과 행주교회다. 행주교회는 아펜젤러와 함께 조선땅에 들어온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중 한 명인 언더우드가 세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개신교회 중 하나다. 행주성당 역시 1909년 세워져 100년이 훌쩍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이러한 개화의 영향으로 행주동은 고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인상적인 만세운동이 펼쳐진 고장으로 이름을 남긴다. 행주 주민 뿐 아니라 외지의 인력까지 규합한 수백명의 민초들이 만세운동에 동참했고, 형식적으로도 행주산성에서의 만세가 행주나루의 선상만세로 이어지는 조직적 면모를 보여준다.


개화와 수탈 실어 나른 경의선

개화는 육로와 수로 외에 또 하나의 길을 고양에 선사했다. 바로 철로였다. 1906년 개통된 경의선이 고양땅을 가로지르며 능곡역과 일산역이 만들어졌다. 사람과 물자의 대량이동 시대가 본격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철로는 폭압과 수탈을 동반한 고약한 선물이었다. 용산에서 신의주를 연결하는 경의선은 일제가 한반도 강점은 물론, 장차 만주대륙으로 진출하려는 야망을 실현시켜 줄 기반시설이었던 것이다.

경의선 기차역이 만들어진 능곡과 일산은 이후 고양땅에서 펼쳐진 여러 항일운동의 중심으로 부각한다. 직접적으로는 일산역과 일산시장을 중심으로 대규모 장날 만세운동이 펼쳐졌고, 간접적으로는 만주지역을 중심으로 무장독립운동을 펼쳤던 독립지사들이 경성으로 잠입하는 길목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06년 경의선 개통은 고양땅에 개화의 물결과 일제의 수탈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사진 속 옛 일산역사는 1933년 지어진 건물로, 현재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00년 전 키워드, 민초들의 고통

이번 연재에서는 독립운동을 하나의 ‘대의명분’으로 해석하는 입장을 내려놓고자 한다. 조국 독립과 외세에 대한 항거를 당연히 실천했어야 할 유일한 행위기준으로 보는 태도는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시선이다. 역사의식이나 대의명분보다 훨씬 강렬하게 당대 민초들의 삶을 구속하는 것은 바로 ‘고통’이다. 고통에 대한 저항은 인간의 가장 본질적이고 정직한 자기표현이 아니던가. 그렇기에 고양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살피는 시선은 끊임없이 자료의 행간에 숨은 민초들의 신음소리에 주목하고자 한다. 고통에 대한 상상력이야말로 100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누군가의 분노와 행동을 이해할 수 있는 창을 열어주는 가장 유용한 열쇠라고 믿기 때문이다.
 

민초들의 땀과 열망, 송포의 간척사업

100년 전 이 땅에 살았던 민초들의 열망과 절망을 동시에 상상할 수 있는 하나의 사례를 살펴보자. 향토사학자 최경순(고양공양왕고릉제 제전위원장)씨는 19세기 말부터 진행된 송포지역의 토지 개척에 주목한다. 1895년 제작된 지도를 면밀히 살펴보면, 한강과 인접한 지금의 장항동과 송포동 일대의 드넓은 농경지 대부분이 육지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조수간만에 의해 한강물이 차고 빠지는 강 하구 갯벌, 또는 모래톱의 형태였던 것이다. 한뼘의 땅도 아쉬웠던 민초들은 이곳을 간척·개간해 농토로 만들고 싶었지만 ‘모든 국토는 왕의 소유’라는 토지 개념을 가지고 있었던 조선은 원칙적으로 양민의 간척사업을 엄금했다.

그런데 20세기 초에 제작된 지도에는 앞서 말한 지역이 대거 농경지로 개간돼 있음을 보여준다. 약 20년의 기간동안 무려 100만 평이 농토로 변한 것이다.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진 걸까. 최경순씨는 행정권력에 공백이 생긴 틈을 타 민초들이 하구 개펄과 모래톱을 개간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세상의 흐름을 올바로 읽지 못해 국운이 기울면서 중앙권력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이 민초들에게는 오히려 토지소유에 대한 강렬하고 능동적인 열망을 자극하는 기회가 됐으리라는 것이다.
 

고양의 가장 넓은 곡창지대인 송포 들녘. 19세기 후반까지 한강 하구 갯벌이었던 곳을 민초들이 피땀을 흘려 간척했지만, 일제의 토지조사를 거치며 소유권을 강탈당해야 했다.


총칼 앞세운 일제의 수탈

하지만 이들의 열망을 고스란히 앗아간 것은 바로 일제였다. 합방 이후 일제가 가장 주력했던 것은 바로 토지조사를 통한 땅의 수탈이었다. 일제는 조선의 허술한 토지제도의 틈새를 완벽하게 이용해 전 국토의 40%를 조선총독부의 소유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토지소유를 증명할 아무런 근거가 없는 송포 들녘의 드넓은 간척지가 일제에게 너머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아가 한반도 최초의 주식회사라는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한 동양척식회사를 앞세워 파탄에 내몰린 민초들의 땅마저 빼앗아 일본에서 건너 온 이주민들을 지속적으로 정착시켰던 것이다. 처음으로 자기 땅을 가져볼 수 있으리라는 희망에 부풀어 흘린 땀과 눈물, 그리고 그 땅을 총칼을 앞세우고 들이닥친 일제라는 도적떼들에게 빼앗기며 흘린 피눈물. 이러한 고통의 흔적이야말로 고양땅에서 펼쳐진 민초들의 항일운동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

 

■ 도움말 : 백창환·이철민(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최경순 향토사학자, 정동일 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

■ 참고자료 : 『고양 독립운동사』(이정은, 광복회고양시지회), 『고양시사』(고양시), 『행주성당 100년 이야기』(강종민, 아네스출판사), 『능곡교회 120년사』(연규홍, 능곡교회), 『고양 1920's』(송종훈, 무일근대연구소), 『자랑스런 고양 100인선』(이은만, 고양신문),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정동일, 고양시), ‘고양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자료집’(1회~6회, 광복회고양시지회), ‘신문기사 속 1920년대 고양’(최경순), ‘행주나루터 선상 만세운동의 의미와 계승·발전을 위한 토론회 자료집’ 외(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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