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 3.1운동 100주년 특집 ‘고통을 승화시킨 숭고한 저항의 역사’ (3)

<연재 순서>

(1) 연재를 시작하며 - 100년 전 고양은 어떤 곳이었을까
(2) 일제에 저항한 고양 사람들 - 국채보상운동과 의병운동
(3) 고양의 3·1운동(상) - 육로·수로·철로를 타고 퍼진 독립의 열망
(4) 고양의 3·1운동(하) - 산 위에서도 배 위에서도 울려 퍼진 만세 소리
(5) 고양의 독립운동가(상) - 만세시위에서 농촌운동까지, 양곡 이가순
(6) 고양의 독립운동가(하) - 기미독립선언의 구텐베르크, 동암 장효근
(7) 고양 독립운동의 가치와 계승 - 아직 못다 이룬 대한독립 만세의 꿈

 

서울 만세운동 열흘 후 
20일 동안 곳곳서 만세운동

시위 참가자 대부분 농민들
능곡교회 등 기독교인도 참여
일본 헌병 가혹하게 진압

 

서울 거리로 쏟아져 나온 3.1만세운동 군중들.


[고양신문] 일제시대는 물론, 우리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민중운동은 바로 3·1만세운동이다. 고양에서도 3·1운동의 뜨거운 외침은 들불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특별히 부각된 인물이나 사건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고양의 3·1운동은 그동안 별다른 조명을 받지 못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름 없는 농민들이 다채로운 방식으로 독립의 열망을 표출하며 흘린 뜨거운 피눈물의 흔적을 고양땅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다. 합방과 함께 진행된 토지수탈의 참상, 그리고 100년 전 고양땅에서 펼쳐진 3·1운동의 이야기를 2주에 걸쳐 살펴보고자 한다.  

소농을 몰락시킨 토지조사사업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통감 데라우치의 한일병합조약 체결과 함께 519년을 이어오던 조선(당시 국호는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한다. 이제 일제의 총독부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게 됐다. 물론 총독부 관리들은 무력을 직접 행사하지 않았다. 그런 험한 일은 시골 농촌마을까지 침투한, 허리춤에 칼을 찬 일제 헌병경찰들의 역할이었다.

아시아의 오랜 패권국가 청나라는 물론, 내로라하는 서구 열강들마저 거뜬히 제끼고 조선을 거머쥔 일본은 게걸스럽게 실속을 차리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시작한 건 토지조사사업이다. 토지를 소유한 자는 조선 총독이 정하는 기간 내에 주소, 씨명, 명칭 및 소유지의 소재, 지목, 자번호, 사표, 등급, 지적, 결수를 명시해 조사 국장에게 신고해야 한다는 명을 내렸다. ‘근대적 토지제도 도입’을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실은 소유개념과 경작개념이 이원화된 조선 토지제도의 허점을 간파한 계략이었다. 원칙적으로 조선의 모든 토지는 나라님의 것, 백성은 수조권과 경작권을 가질 뿐이었다. 물론 조선후기로 오면서 질서 자체가 무너져 민간의 사적 매매가 일상화됐지만, 여전히 허술한 구석이 많았던 점을 이용해 일제는 소유권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는 토지를 가차 없이 국가 소유로 만들어버렸다.

여기에 근대적 제도에 어두운 농민들의 어수룩함도 한몫했다. 오랜 세월 조세의 공포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괜히 신고를 해봐야 세금만 더 내라고 할까봐 일부러 신고를 안 한 이들도 많았다. 그 결과 버젓이 주인이 있는 땅마저 총독부 소유로 넘어간 땅이 부지기수였다. 그나마 대농들은 자신의 소유를 지킬 수 있었지만, 중소지주와 자작농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이러한 상황은 이후 일제가 우리 민족을 대한 커다란 원칙 하나를 예고하는 장면이었다. 기득권 세력은 일제의 우호세력으로 만들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은 철저히 수탈한다는 원칙 말이다.

고양땅 절반이 일제로 넘어갔다

토지조사에서 겨우 땅을 지킨 농민들에겐 동양척식주식회사(동척)라는 더 무서운 늑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동척은 농민들에게서 차지한 땅을 일본에서 한반도로 넘어오는 농업이민자들에게 무상, 또는 저가에 불하했다. 1920년대 신문에 실린 고양군 관련 기사를 번역한 책 『고양 1920’s』에는 고양군 중면 장항리에서 벌어진 한 일본인 악행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그를 ‘일본 덕도(도쿠시마)현에서 20여 호가 단체로 이주해 온 이민자’로 소개하고 있다.

동척의 활약은 단순히 이민개척에 머물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조선 농민들의 땅을 빼앗아가는 선봉대 노릇을 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고리대’였다. 농민들은 춘궁기에 인심 좋은 표정으로 돈을 빌려주는 동척에 손을 벌렸다. 가을에는 “형편도 어려운 데 천천히 갚으라”며 채무기한을 흔쾌히 연장해줬다. 그렇게 어물어물하는 사이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마련. 성장기에 일제시대를 경험한 이영찬 고양시씨족협회장은 “동척 돈 3년 쓰고 땅문서 집문서 날렸다는 이야기가 허다했다”며 해방 당시 고양땅의 절반 이상이 일본인 땅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고양에도 거대한 토지를 소유한 일본인 지주들이 경의선 일산역 부근에 일본집을 짓고 살며 커다란 양잠농장과 배밭 등을 경영했었다고 말한다. 

통계에 의하면 일제는 전 국토의 40% 이상을 직접 빼앗은 것으로 알려졌다. 물론 나머지 땅에서는 가혹한 징세가 이어졌다. 일제는 이러한 일련의 수탈 과정을 근대적 합리성을 빙자한 제도의 탈을 쓰고 집행했다. 국권의 침탈 과정에서 진행된 기만적 행태가 개개인을 예속화하는 과정에서 고스란히 반복된 것이다. 제 나라에서 땅을 잃은 농민들은 하루아침에 일본인들의 소작농으로 전락했고, 일부는 공장노동자가 됐지만 조선인의 임금은 일본인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했다.
 

일산역 앞 일본인들의 주거지역이 있었던 지역에는 오늘날 고층 아파트가 들어섰다.


동척 소작인 전락한 농민들 큰 고통

나라 없는 백성들의 삶은 고달팠다. 근대적 농법 도입으로 쌀 생산량은 늘었지만 막대한 양이 일본으로 보내졌기 때문에 농민들은 배를 곯아야했다.
『고양 1920’s』에 등장하는 ‘동척 소작인과 두박 문제’라는 기사를 살펴보자. 고양군 송포면의 동척 소작인들이 회사 측의 냉혹한 처사에 분개하고 있는데, 이유인 즉 근래 보기 드문 흉작이 닥쳤음에도 동척은 소작료를 낮춰주기는커녕 만주에서 사들인 두박(비료로 사용하는 콩지게미)을 2배 이상 비싼 값에 강매했기 때문이라는 것. 기사는 ‘만약 이를 사용치 아니하는 소작인은 소작권을 탈취함으로 부득이 회사의 명대로 이를 빌렸으나 그 양이 다량이므로 도저히 사용할 수 없어 헐값에 다른 곳에 전매하는 등의 곤란을 겪는 중’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흉작에 배를 곪는 농민들에게 필요도 없는 비료를 떠넘기며 빚을 늘렸다고 하니, 당시 동척의 횡포가 얼마나 악랄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같은 책에는 일본 도쿠시마현 이민자들에게 좋은 농경지를 빼앗기고 황무지 같은 땅에 기대어 사는 행주벌판 농민들이 흉년이 닥쳐 굶어죽을 처지에 놓였다는 비참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또한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의 한 주민이 일본인 고리대금업자를 철도끼로 때려 참살했다는 기사에서는 고리대금업자를 향한 고양땅 농민들의 극한에 다다른 분노를 읽을 수 있다.

만세운동의 근원은 백성의 고통

3·1만세운동은 하루아침에 누군가의 각성과 결단에 의해 터져 나온 게 아니다. 다양한 요인들이 작용해 인내와 저항의 경계를 자극한 결과물로 보는 게 마땅하리라.
일제의 강력한 무단통치가 10년 동안 이어지자 조선 백성들의 정서에 반일 감정이 쌓일 대로 쌓였다. 이러한 가운데 해외에서 들려온 ‘민족자결주의’라는 구호는 지식인들의 자주의식을 일깨웠고, 여기에 천도교와 기독교, 불교와 같은 종교인들의 민족주의적 각성도 보태졌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힘의 근원은 역시 임계점을 넘어선 민초들의 고통이었다. 앞서 살펴본 고양땅 농민들의 비참한 사정은 사실 한반도 전역에서 똑같이 진행된 조선 백성들의 고초었다.
더욱이 1917년부터 시작된 일본의 쌀값 폭등은 바다 건너 한반도에 더욱 혹독한 영향을 남겼다. 쌀값 안정을 위해 식민지 조선의 쌀을 무한정 반출해 갔기 때문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18년 세계적으로 유행한 스페인 독감은 한반도에서도 어김없이 수많은 목숨을 빼앗아갔다. 이렇듯 한계에 다다른 고통은 거꾸로 거대한 힘과 맞서는 용기를 배양했다.

때마침 고종의 국장이 터졌다.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못난 임금이었지만, 백성들은 옛 임금의 죽음에 자신들의 비참한 처지를 투영하며 눈물을 흘렸다. ‘고종이 일제에 의해 독살됐다’는 소문은 식민지 백성의 슬픔이 만든 분노의 기폭제였다.

고종의 국장을 이틀 앞둔 3월 1일, 만세소리가 한반도를 뒤흔들었다. 종로 태화관에서의 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서 낭독, 그리고 파고다공원에 모여든 학생과 군중들의 만세 함성을 시작으로 3·1만세운동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대대적 독립만세 시위가 일어나자 일제는 처음부터 기마경찰과 군인들을 동원해 평화적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서울 종로 거리를 가득 메운 만세 물결.

 
산에서 배에서 고양 곳곳서 만세시위

고양에서도 3·1운동이 있었냐고 묻는 이들이 있는데, 기록에 나타난 것만도 30여 회의 만세운동을 확인할 수 있다. 시위가 발생한 시기를 살펴보면 3·1운동 발발 열흘 후인 3월 11일 이후부터 3월 말까지에 집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유는 어렵잖게 짐작된다. 사대문 안에서 시작된 만세운동이 소문과 격문을 타고 고양으로 넘어오고, 나름대로 거사 날짜를 준비하는 데 열흘 정도가 걸린 것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고양의 첫 시위가 11일에 발생하는데, 그 전에 용강면 공덕리와 연희면 수색리 등을 경유해 만세의 물결이 전파되는 양상을 보인다. 육로로는 의주로를 따라 벽제면으로, 물길로는 행주나루를 통해 지도면으로, 철길로는 경의선을 타고 중면 일산리로 만세 소식을 가슴에 안은 사람들의 발걸음이 흘러들어갔던 것이다.

시위가 발발한 장소를 살펴보자. 당시의 기록에는 고양시 각 면에서 골고루 시위가 일어났다는 점을 명기하고 있는데, 유일하게 원당면만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고양지역 헌병부대의 기록을 보면 다시는 시위에 참가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고 풀려난 단순가담자 중 주소지가 원당면인 사람만 373명에 이른다. 장소가 확인되지 않았을 뿐, 다수의 원당면 주민들도 활발히 시위에 참여했음을 보여준다. 결국 고양군 6개 면 전부가 3·1운동에 참여한 셈이다.

시위 주동자로 체포된 20여 명의 신분을 살펴보면, 2명을 제외하면 다들 농민이다. 신분적으로도 향촌의 유력한 지도자가 보이지 않아, 고양 독립운동 전반을 일관하는 서민적·민중적 성격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개중 흥미로운 인물을 살펴보면 3월 23일 용두리 시위를 주동한 임수학은 ‘이발업’으로, 3월 24일 송포면사무소 앞 시위에 참여했다가 체포된 이용은 ‘의생(醫生)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양땅에서는 민초들에 의한 자발적 만세운동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각양각색의 시위 양상 또한 무척 흥미롭다. 많게는 800여 명이 모인 대규모 만세가 있는가 하면 십 수 명이 펼친 기습만세도 있고, 사람이 많이 모이는 날을 이용한 장날만세,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에서의 거점만세, 산마루에 올라가 횃불을 치켜든 산상만세, 행주산성과 서오릉에서 집결한 유적지만세, 그리고 배 위에서 외친 선상만세, 1박 2일 동안의 철야만세 등 지역과 형편에 따라 예측불허의 다채로운 모습으로 시위가 전개됐음을 알 수 있다.

시위는 초기에 비폭력 평화시위로 펼쳐졌지만, 나중에는 면사무소 등에 돌을 던지기도 하고 일인 가옥을 공격하는 등 일정부분 폭력이 수반되기도 했다.  

일산역 전시관에서 만날수 있는 3.1만세운동 기록 전시물.

 
만세시위 후 더 가혹해진 탄압

고양에서 펼쳐진 가열찬 만세운동의 기록을 가슴 뛰는 무용담이나 뿌듯한 자부심으로만 읽어선 안된다. 이는 고스란히 혹독한 탄압과 잔인한 징벌의 기록이기도 하다. 한 줄의 짧은 기록마다 만세운동 참가자들의 붉은 핏방울이 배어있는 것이다.

시위 참가자들은 분위기에 들떠 휩쓸리듯 만세대열을 이룬 이들이 아니었다. 이들은 3월 초 경성 한복판에서부터 전파돼 온 만세꾼들을 일제 군경이 어떻게 진압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누군가는 현장에서 총칼을 맞기도 했고, 누군가는 끌려가 옥에 갇히고, 몸이 으스러지도록 매를 맞고 나오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다음 바쳐야 할 목숨이 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각오하고 만세를 외쳤던 것이다.

3월 11일 시작된 고양의 시위가 3월 말까지 이어졌다가, 4월에는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일제의 진압이 그만큼 집중적이고 잔혹했다는 뜻이다. 의병전쟁을 이야기하면서도 거론됐듯, 서울과 가까운 고양땅은 그만큼 일제의 병력 출동이 용이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3·1만세운동과 연관해 전국에서 7500여 명이 피살됐고, 4만6000여 명이 검거됐으며 1만6000명이 부상을 당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49개 교회와 학교, 715호의 민가가 불에 탄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공식 기록으로 밝혀진 피해에 불과하다. 역사의 이면에 얼마나 더 많은 이들이 희생당했는지는 아무도 정확히 알지 못한다.
 

능곡지역 만세운동 주동자들이 다녔던 능곡교회의 현재 모습. 128년 역사를 품은 교회다.

 
이름 없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이름 없는 희생자들에 대한 하나의 예가 고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회 중 하나인 능곡교회에 전해 내려온다. 광복회 고양시지회가 마련한 학술심포지움에서 ‘경기도 고양지역의 3·1독립운동’에 대해 발표한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김승태 연구위원의 자료에는 3·1운동 당시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한 만세시위자들을 치료했던 의료선교사 베시(F.G. Vessy)의 면담기록이 나온다. 그 중 3월 31일자 기록을 살펴보자.

‘박윤낙(당시 25세)은 고양군 지도면 토당리 출신으로, 사면교회(지금의 능곡교회) 신도로서 3월 말 그의 마을과 이웃 마을 주민이 모두 모여 ‘만세’를 부르며 거리 시위를 했다. 서울에서 온 기마헌병들이 시위와 만세를 멈추고 해산하라고 명령했다. 닷새 후 헌병들이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닷새 전 만세시위를 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다녔다. 박윤낙은 자신이 만세시위를 했다고 당당히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체포돼 끌려왔다. 이들은 감옥이 아닌 정부 관리의 집무공간에 끌려가 태장을 맞았다. 박윤낙은 60대를 맞았는데 상처투성이로 병원에 입원중이다.’

이 기록에서 일본 헌병들이 마을에서 벌어진 평화로운 만세운동에 대해서도 집요한 추후 색출작업을 진행했고, 색출된 시위 가담자들을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무자비한 임의 체벌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태형 60대면 불구가 되거나, 심할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무서운 형벌이다. 25살 청년이 무기 하나 들지 않고, 그저 이웃 주민들과 함께 맨손으로 만세를 외친 댓가가 너무도 가혹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능곡교회에서는 교회 산하의 교육기관인 보명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던 유현경 선생이 마찬가지로 태형 60대를 맞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민족의식을 일깨운 지역사회의 지도자였던 유현경의 사망에 대해서는 일제의 총을 맞고 순국했다는 다른 주장이 전해지기도 한다. 모두가 공식 기록에서는 확인할 수 없는 잊혀진 역사다.

박윤낙과 유현경 뿐이겠는가. 3·1운동을 전후해 민족의식을 각성하고 조국의 독립을 용기있게 외친, 수많은 고양땅 장삼이사, 갑남을녀들의 고통과 희생은 고양의 후손들이 기억하고 계승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정신적 자산이 아닐까.   
 

■ 도움말 : 이은만(문봉서원장), 이영찬(고양시씨족협회장), 백창환·이철민(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최경순(향토사학자), 정동일(고양시문화재전문위원)

■ 참고자료 : 『고양 독립운동사』(이정은, 광복회고양시지회), 『고양시사』(고양시사편찬위원회), 『고양 1920’s』(송종훈, 무일근대연구소),  『능곡교회 120년사』(연규홍, 능곡교회), 『고양의 독립운동 이야기』(정동일, 고양시), ‘고양독립운동사 학술심포지움 자료집’(광복회고양시지회), ‘신문기사 속 1920년대 고양’(최경순), ‘경기도 고양지역의 3·1독립운동’(김승태), ‘행주나루터 선상 만세운동 토론회 자료집’(민족문제연구소 고양파주지회)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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