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숨결 따라, 역사의 흔적 따라, 고양의 생태하천 기행(1) 공릉천 스케치(상)

■ 연재 순서
(1) 공릉천 상 (2) 공릉천 하
(3) 창릉천 상 (4) 창릉천 하
(5) 도촌천 (6) 장월평천 (7) 대장천
(8) 성사천 (9) 벽제천

 

 

[고양신문] 물길을 따라 생명의 숨결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가는 고양 생태하천 나들이의 첫 순서는 공릉천(恭陵川)이다. 양주시 장흥면 꾀꼬리봉에서 발원한 장흥계곡의 물과 북한산 송추계곡의 물이 합쳐져 일영유원지를 지나 고양시를 거쳐 파주시로 넘어가는, 고양의 대표적 하천이다.  고양시를 통과하는 길이는 13.8km에 불과하지만, 선유동, 신원마을, 송강마을, 관산동, 사리현동, 내유동 등 고양시 북쪽의 마을을 두루 감싸며 다채로운 풍광과 이야기를 연출한다.

공릉천이라는 이름은 파주 삼릉 중 하나인 공릉(恭陵)에서 유래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곡릉천(谷陵川)이라는 왜곡된 명칭이 붙여져 오랫동안 사용되다가, 2009년에 이르러서야 원래의 이름을 되찾았다. 고양 사람들은 심천(깊으내), 신원천 등의 옛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공릉천은 주변의 다양한 물길이 모이는 메인 스트림이다. 지방하천인 선유천, 오금천, 벽제천 대차천, 원당천과 소하천인 한무물천, 능골천, 두포천, 고곡천, 내유천, 놀미천, 새터천, 사리현천, 물구리천이 모두 공릉천으로 사이좋게 합류한다. 덕분에 사시사철 수량이 넉넉해 수많은 물고기와 새들이 보금자리를 삼고 있다. 

 

능선교~지영교 고양 구간 13.8km
14개의 하천이 모여드는 큰 줄기
송강 역사와 마을의 추억이 가득
물고기와 새들에겐 편안한 안식처
어디서든 보이는 북한산의 자태

 

신선유교에서 바라본 노고산과 북한산.


설레는 마음으로 길을 나선 아침, 장마가 예고됐지만 다행히 비는 내리지 않고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다. 자전거 나들이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다. 여러 해 고양시 하천을 누비며 하천지도와 자전거길 지도를 손수 만든 한기식 자전거21 고양지부 사무국장이 나들이에 동행한다. 날씨도 좋고 길동무도 든든하니 페달을 밟는 기분이 상쾌하다.   
공릉천 고양시 구간의 출발점은 양주시 삼하리와 고양시 선유동을 연결하는 다리인 능선교다. 머리 위로 서울외곽순환도로 공릉천1교가 지나는 이곳은 여름이면 다리 아래 물놀이객들이 장사진을 이루는 맑은 여울이다.

공릉천은 시작과 함께 복작거리는 유원지들을 정신없이 거쳐 오지만, 자연하천으로서의 자정능력을 잘 간직한 덕분에 수질은 무척 깨끗하다. 특히 고양시 영역 상부에 해당하는 능선교에서 벽제교 구간은 맑은 물에서만 사는 다슬기와 재첩은 물론, 천연기념물 수달의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능선교에서 조금 내려오니 건너편에 공릉천 명승지 중 하나였던 청천수(靑川水)가 눈에 들어온다. 청천수는 바위절벽 아래 물이 맑고 깊어 붙여진 이름으로, 인근에서 자란 개구쟁이들에게는 여름철 멱을 감던 추억의 장소다. 안타깝게도 모래톱에 외곽순환도로 기둥이 세워지며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때로는 추억이 풍경보다 수명이 길 때도 있다. 알고 보니 십대 초반부터 지축동에 살았던 기자도, 대자동이 고향인 한기식 사무국장도 동네 친구들과 물놀이를 하러 청천수를 찾았던 오래된 기억 한 자락씩을 공유하고 있었다.
 

자전거도로를 연결해 주는 신선유교.


정수장 물 대던 상산보, 백로의 먹이터로

선유동 불미지마을 부근에는 자전거길을 잇는 신선유교라는 날렵한 다리가 놓였다. 다리 자체도 아름답지만, 다리 위에서의 조망하는 공릉천과 북한산의 풍광이 더없이 멋지다. 백운대를 중심으로 인수봉과 만경봉이 어깨를 걸다가 은평구 방향으로 흐르듯이 이어지는 능선 실루엣이 한 눈에 조망된다.

신선유교 부근 선유천 합류지점에는 교외선 철길이 지나는, 3개의 아치형 교각이 떠받치는  작은 철교가 있다. 기차가 끊긴 교외선 철길 위로 풀들이 비죽비죽 자라는 모습이 쓸쓸하다. 신선유교를 건너면 혜지낚시터가 보이는데, 이곳 역시 낚시터로서의 용도를 접고 텅 빈 연못만이 덩그러니 남아있다. 자전거길은 푸르른 그늘을 드리운 등나무 덩굴 터널로 이어진다.
 

선유동 불미지마을 초입의 작은 철교.

 
이어지는 곳은 고양시 구간의 첫 보(洑)인 상산보다. 상산보는 바로 옆 정수장에 상수원을 공급했지만, 정수장이 기능을 멈추면서 지금은 시설이 낙후돼가는 무용지물 보가 됐다. 정수장은 2011년 고양 아쿠아스튜디오로 변신해 ‘명량’과 ‘기생충’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수중장면을 촬영한 명소가 됐다.

고양시는 건너편에 멋진 바위언덕이 있는 상상보 부근에 작은 전망대를 만들어놓았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백로와 왜가리가 각각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튀어오르는 물고기를 낚아채는 한가로운 모습을 감상할 수 있다. 
 

과거 정수장에 물을 대던 상산보.


시간을 호출하는 지구레코드사와 신원 덕명교비

공릉천은 곳곳이 기억 저장소다. 공릉천이 통일로와 교차하는 벽제교에 닿기 전에 두 개의 기억저장소를 차례로 만난다. 하나는 강 건너편 둑방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지구레코드사 터다. 90년대 이전까지 서울 외곽의 한적한 변두리 동네였던 고양군에서 성장한 이들에게 공릉천변에 널찍하니 자리하고 있던 지구레코드사 건물은 은근한 자부심을 심어주던 랜드마크였다. 가왕이라 불리던 조용필을 필두로 유명 가수들의 음반을 줄줄이 찍어내던 굴지의 음반회사였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 주변이 창고형 공장지대로 변했는데, 가요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지구레코드에 대한 추억을 호출하는 작은 기념건물이나 음악카페가 공릉천변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면 어떨까 하는 즐거운 상상을 해본다.  
 

오금천 합류지점에 서 있는 신원 덕명교비.

 
또 다른 기억저장소는 오금천이 공릉천과 합류하는 지점 부근 공원에 서 있는 옛 비석 ‘신원 덕명교비’다. 조선 효종 때 세워진 이 비석은 장마철만 되면 범람하던 공릉천에 관원과 백성들이 힘을 모아 튼튼한 돌다리를 세운 것을 기념하고 있다. 다리 하나를 놓는 일이 옛 사람들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감격적인 일이었나를 미루어 짐작케 한다.

 

송강 공릉천 공원 안내 간판.


송강의 문학혼 숨쉬는 송강시비공원

벽제교에서 신원교 사이의 ‘송강 공릉천 공원’은 신원마을 사람들의 천변 쉼터다. 송강과 강아의 사랑 이야기를 모티프로 만남의 강, 사랑의 강, 약속의 강이라는 구간별 스토리텔링을 선보이고, 다채로운 휴게공간을 조성해 놓았다.

송강 공릉천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송강시비공원(松江詩碑公園)이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송강 정철을 기념하는 다양한 조형물과 함께 송강의 작품을 자연석에 새겨 넣은 아름다운 시비들을 감상할 수 있다. 정자와 가사문학의 독보적 대가였던 송강 정철, 그리고 그가 공릉천변에서 자연과 벗하며 지냈던 이야기는 공릉천 구간 전체를 통틀어 가장 흥미로운 역사·문화적 콘텐츠가 아닐 수 없다.
 

송강 정철의 문학세계를 기리는 송강시비공원.

송강시비공원 조성에 노년의 열정을 바치고 있는 이은만 분봉서원장은 “아름다운 자연과 송강의 문학혼이 함께 숨쉬고 있는 공릉천변을 보다 많은 이들이 즐겨 찾는 ‘고양시의 세느강변’으로 만드는 운동을 시민들이 함께 펼쳐보자”고 제안한다. 송강시비공원 아래쪽에는 송암보가 공릉천 물을 넉넉히 가두고 있는데 신원교와 벽제육교, 교외선 철교가 순서대로 교차하며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송암보와 교외선 철교가 어우러진 풍경.


징검다리에서 바라보는 북한산 풍광

송암보를 지나면 고양누릭과 겹쳐지는 곧게 뻗은 둑길이다. 왼편으로는 플랜테이션 캠핑파크의 앞마당이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는 대자산과 노고산 능선 너머 또 다시 북한산이 조망된다.

그런데 공릉천 둑방길의 포토존 중 하나였던 키다리 메타세쿼이아길이 몇 해 전부터 중간이 잘려 영 볼품없이 돼 버렸다. 가까이서 살펴보니 나무 위로 지나가는 전깃줄을 보호하기 위함인 듯하다. 나무가 먼저 심어졌는지, 아니면 전깃줄이 먼저 설치됐는지 순서는 잘 모르겠지만, 위치와 설계를 조금만 잘 했더라면 늘씬한 멋쟁이를 몽당연필로 만들어놓는 참사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관산동 메타세쿼이아 둑방길.
관산동 징검다리 위에서 바라본 북한산의 실루엣.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천변으로 내려가 징검다리를 밟는다. 징검다리 중간에서 공릉천 물줄기 바로 위로 멀리 북한산이 듬직하게 얹히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공릉천은 굽이를 꺾을 때마다 북한산을 한 번씩 뒤돌아보며 흐르는 하천이고, 북한산은 그 때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듬직한 벗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사람 냄새 정겨운 관산동 주택가

이제 공릉천은 관산동을 끼고 흐른다. 70~80년대 통일로를 따라 상가와 주택가가 밀집되며 형성된 관산동은 여전히 삶의 활기가 넘쳐나는 정겨운 동네다. 공릉천변에 체육공원과 필리핀 참전비, 태극기역사공원이 조성돼 있고 둔치 꽃밭에는 마을 주민들이 가꾸어놓은 꽃들이 나들이꾼에게 인사를 전한다. 동네 바로 옆으로 넉넉한 공릉천이 흐르고, 천변에 나와 산책도 하고 이웃들과 만나는 덕분에 주민들의 마음 풍경이 조금은 더 여유로워지지 않았을까.
 

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관산동 주택가.

 
관산동을 지나면 고양시 구간의 종착점인 지영교까지 자전거도로가 잘 닦여 있는데, 최근에 정비를 다시 한 듯 도로 위 라인이 선명하고 도로 변 수풀도 깔끔하게 다듬어졌다. 왼쪽으로는 우거진 갈대숲을, 오른쪽으로는 경사면의 관목숲을 끼고 달리자니 저절로 콧노래가 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새와 동식물이 머무는 공간에 사람과 자전거가 끼어든 것 아닌가 하는 미안함도 생긴다. 생태적 친구들에 대한 배려와 예의를 지키는 방문자들의 매너가 중요하지 싶다. 

지영교에서 마주한 분단시대의 살풍경

나지막한 돌난간 사이로 자전거길과 도보로가 놓인 있는 가화교(佳話橋)는 이름처럼 아름다운 다리다. 돌판에는 이 장소가 고양시 최고의 경치를 자랑하던 곳이었다는 설명과 함께 ‘이용자들의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가 추억으로 많이 만들어지기를 기원하는 뜻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한국농어촌공사에서 한참 시공중인 선우궁보를 지나면 폭이 좁아 차량 2대가 교행하지 못하는 사리현2교가 나온다. 최근 반대편에 진입한 차량을 표시해주는 스마트 보행신호가 설치돼 성급한 운전자들의 성미를 다독여준다.

교량 폭이 좁은 관계로 잠시 자전거를 세워두고 다리 한 가운데로 걸어가 경치를 감상한다. 출발점과는 사뭇 다른, 하천 하구 특유의 유장한 풍광이 시선을 가득 채운다. 둔치에는 푸르른 갈대가 무성하고, 보에 갇혀 유속이 느려진 수면 위에는 부유식물이 영역을 넓히고 있다.
 

제2사리현교에서 내려다 본 공릉천.
지영교 하류의 대전차방호시설.

 
이어 네 번째 보인 휴암보를 지나면 공릉천 고양시 구간의 비로소 종점인 지영교에 도착한다.
지영교에 올라서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이질적 풍경과 마주해야 한다. 파주시 방향으로 하천을 가로질러 수백개의 콘크리트 덩어리가 줄을 맞춰 물길과 강둑을 가로지르고 있다. 적의 탱크를 저지하기 위한 대전차 방호 시설물이다. 접경지역 정서에 익숙한 토박이들에겐 특별할 것 없는 모습이지만, 새삼 생각해보면 분단국가의 냉혹한 현실을 상기시켜주는 살벌한 풍경이 아닐 수 없다.

하긴, 이곳에서 조금만 더 흘러내려가 공릉천이 한강과 합류하는 지점인 송촌대교에서는 오두산 통일전망대 너머 북한땅이 선명히 건너다보인다. 생명과 삶을 노래하며 흐르는 강이 분단과 대립의 공간에서 여정을 마무리해야 하는 슬픈 시절이 하루 빨리 청산되기를 기원해본다. 공릉천의 역사와 생태, 그리고 지혜로운 이용에 대한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 주에 이어진다. 

동행취재 : 한기식 자전거21고양지부 사무국장
도움말 : 권해원 고양환경단체협의회 회장, 이은정 에코코리아 사무처장

 

취재에 동행해 가이드 역할을 해 준 한기식 자전거21고양지부 사무국장.

 

상산보 옆 고양누리길 전망대.

 

신원마을 앞 송강 공릉천 공원.

 

고양 아쿠아스튜디오 부속건물.

 

관산동 태극기공원의 88서울올림픽 기념비. 당시 고양군에서 사이클도로경기가 열렸었다.

 

농어촌공사에서 건설중인 선우궁보.

 

하천과 둔치, 아파트가 어우러진 공릉천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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