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범구 대사의 독일대사>

[고양신문] 제목도 긴 김형민 PD의 책을 어렵사리 구했다. 맨 먼저 드는 생각, "언제 이걸 다 썼지?"

서울에 있을 때 이곳저곳 술집에서 조우했던 기억과, 한 번 시작하면 새벽까지 이어지기 일쑤였던 그와의 술자리들이 먼저 떠올랐다.

게다가 PD라는, 한국에서는 아주 소모도가 높은 직업의 소유자 아닌가?

산하라는 필명으로도 익숙한 그의 팬덤은 만만치 않다. 그가 SNS를 포함, 여러 매체에 쓰는 역사 관련 글, 또 역사를 빌어 현실을 날카롭게 풍자하는 글을 보면 나는 그가 천재라고도 생각한다. 이 시대 아저씨들의 평균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그의 비주얼을 기억하는 이들이 내 말에 동의하고 아니고는 별개의 일이지만. 어쨌든 그의 글들을 읽으며 나는 종종 왕년의 걸출한 문사 이병주의 명구를 떠올린다.

"햇빛(일광)에 물들면 역사가 되고, 달빛(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

김형민의 이 책은 많은 부분 아직 신화로 남아 있는 이야기들을 역사로 편입시키고자 한다. 역사의 어느 갈피에 꼭 갈무리되어 있어야 할 사람들의 이야기.

책 제목에서 네루와 김구를 떠올렸다. 인도 독립의 영웅이며 초대 총리를 지낸 네루는 옥중에서 딸의 교육을 염려하며 직접 딸을 가르칠 목적으로 편지를 쓴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도 『세계사 편력』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어 유명한 역사책이 된다.

비록 옥중에서는 아니지만 김형민은 입시를 위해 역사적 사건이나 인명을 달달 외워대고 있는 딸에게 살아있는 역사, ‘우리 가족과 주변 사람들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물방울이 합쳐져 흐르는 대하 같은’ 역사를 들려주고 싶었으리라.

기약 없는 독립투쟁, 건국투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자식에게 아비의 역사관, 세계관을 들려주고 싶었던 김구는 『백범 일지』를 남겼다. 비록 딸에게가 아니라 아들에게 들려주는 역사 이야기였지만.

이 책은 1, 2편 통틀어 모두 82편의 사람들, 또는 그들이 관련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낯익은 이름도 있지만 낯선 이름들, 역사의 행간에 묻힌 사람들도 많다. 1960년 서울역 압사사고로 숨진 31명은 지역차별의 상징이었던 호남선의 비극을 고발하는 무명의 증인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과거는 현재를 기억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헤이그 밀사로 많이 알려진 이준. 그는 구한말 검사였다.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를 세웠던 법의 수호자였다. 그가 오늘날 사법농단의 주범으로 줄줄이 법정에 선 전직 대법원장, 대법관들을 보면 뭐라고 할까?

똑 같은 시대, 똑 같은 곳에 태어났어도 누구는 만주 군관학교로 가고 누구는 신흥 무관학교로 간다. 일신의 영달을 위해 조국을 파는 이가 있는가 하면 자신을 핍박하던 조국의 독립을 위해 풍찬노숙의 길을 가는 이가 있다.

아들에게건 딸에게건 이런 책 하나 두고 삶에 대해, 세상에 대해 얘기해 볼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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