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사람>(곽은미 감독, 이설 주연)

[고양신문] 탈북민을 다룬 다큐나 영화에는 일단 눈길이 간다. 탈북민의 삶 자체가 드라마틱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시선을 통해 우리 사회를 돌아볼 수도 있다. 영화 <로기완>(김희진 감독, 송중기 주연)이 업로드된다는 넷플릭스 예고를 보고 은근히 기다려졌다. 십몇 년 전 출간된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조해진, 창비)를 영화로 만든 작품이라 하니, 원작의 장점을 잘 살리기만 해도 볼 만할 것 같았다. 하지만 제작사가 넷플릭스? 또 쓸데없는 장면에 돈 바르는 건 아닌지 걱정도 됐다.

영화의 한 장면. 벨기에 땅에서 생존 자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기완.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북조선인민공화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다.  
영화의 한 장면. 벨기에 땅에서 생존 자체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로기완. 난민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자신이 북조선인민공화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는데, 그것조차 쉽지 않다.  

공개 첫날, 리모컨을 눌렀다. 전반부는 재밌게 봤다. 어머니의 희생을 가슴에 묻고 중국을 거쳐 벨기에로 흘러들어와 난민 자격을 얻기 위해 애쓰는 로기완. 탈북민 이야기의 배경을 유럽 무대로 확장한 게 흥미로웠다. 

하지만 원작에 없는 ‘마리’라는 여주께서 등장하고 오금이 저리는 로맨스가 전개되면서 영화의 생기가 식어버렸다. 생존 자체가 절박한 로기완 옆에서 미모와 재능(벨기에와 러시아의 마피아가 동시에 탐내는 프로 사격선수란다)과 재력(물론 아버지의 재력이지만)을 다 가진 마리가 마약과 자기연민에 쩔어 징징거리는 모습은 봐 주기가 민망스러웠다.

물론 마리 덕분에 화려한 액션과 폭력, 로맨스를 마음껏 첨가할 수 있었으니, 전 세계 시청자들의 킬링타임을 짊어진 넷플릭스로서는 쉽고도 당연한 선택이었겠다. <로기완>을 음식으로 표현하자면, 정갈한 한식에 프렌차이즈 식당의 만능소스를 듬뿍 얹어 내놓은 맛이랄까. 그걸 꾸역꾸역 한 그릇 다 비웠으니, 속이 편할 리 없었다.

영화의 한 장면. 관광가이드로 남한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싶은 한영. 하지만 요령도 인맥도 없는 그에게 삶은 힘겹기만 하다. 
영화의 한 장면. 관광가이드로 남한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싶은 한영. 하지만 요령도 인맥도 없는 그에게 삶은 힘겹기만 하다. 

이상한 음식을 먹고 속이 불편할 땐 라면이나 김치찌개처럼 익숙한 맛으로 진정시켜줘야 하는 법. 독립영화 중에서 비슷한 소재(탈북민)를 다룬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곽은미 감독, 이설 주연)을 골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좋은 선택이었다. 넷플릭스를 욕하면서도 외면 못하는 이유가, 이런 보석 같은 영화들도 툭툭 던져주기 때문이다.      

한·중관계가 호시절이던 2010년대 후반, 중국을 거쳐 남동생과 함께 남한으로 넘어온 탈북민 한영은 중국관광객 가이드로 일하며 안정된 삶을 꾸려보겠다는 의지를 다진다. 시험과 면접을 통과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실 관광가이드는 여행사와 관광객과 화장품매장 사이에 끼어 재주껏 자기 몫을 챙겨야 하는 일자리다. 결국 요령과 인맥이다. 

하지만 요령과 인맥은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 한 사람 따뜻한 조력자가 있어 주면 좋으련만, 이곳은 다들 저마다의 삶을 꾸리기 바쁜 나라 대한민국이 아니던가. 동료가 건네는 맥주 한잔도, 알바매장 사장님의 가불 호의도, 딱 거기까지다.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는 온전히 한영 혼자의 몫이다. 게다가 멀리 조선소에서 일하던 남동생마저 연락을 끊고 잠적한다.  

한영에게도 가끔 마음을 기대는 이들이 있다. 하나원에서 친구가 된 정미와, 한영의 현황을 주기적으로 체크하는 담당 형사 태구다. 하지만 요양원 간병인으로 일하던 정미는 남자가 생겼다고 말하면서도 소개를 시켜주지 않더니, 어느 날 외국으로 이민을 간다고 통보한다. “한국에선 탈북민이 외국인보다 못하다”는 말과 함께. 좋아하는 이북식 만두를 맛있게 먹다가 정미의 갑작스런 이별 통보를 받은 한영이 놀란 감정을 짓누르고 무덤덤한 척 남은 만두를 마저 입에 밀어넣는 모습에선 정말이지 울컥했다. 

외로운 남한땅에서 마음을 나눴던 친구 정미마저 새로운 삶을 찾아 한영의 곁을 떠나버렸다.  
영화 <믿을 수 있는 사람>의 한 장면. 외로운 남한땅에서 마음을 나눴던 친구 정미마저 새로운 삶을 찾아 한영의 곁을 떠나버렸다.  

영화는 한번 더 관객들과 내기를 한다. 때때로 한영을 방문하는 담당형사는 왜 사소한 것을 챙겨주는 걸까? 혹시라도 한영에게 따뜻한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닐까? 하지만 태구 역시 한영에게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천천히 말한다. 나는 그냥 일로써 대한 것뿐이고, 곧 전근을 간다고. 한영과 관객의 마음이 동시에 무너져내린다. 

마지막 장면은 공항이다. 한영이 캐리어를 들고 어디론가 떠나려 한다. 어디로 가는 걸까. 거기에서는 믿을 수 있는 한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영화는 탈북민 한영의 눈을 빌려 믿을 수 있는 사람 하나를 찾기 힘든, 또는 누군가에게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버거운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해준다. 한영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이 딱히 못된 인물들이 아니라서, 그 돌아봄이 더 묵직하고 쓸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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